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문단 편집) === 흐루쇼프 집권기 및 출당 ===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하자 다시 복귀하였고, 체포된 아내 폴리나 젬추지나도 석방되었다. 스탈린 이후에 여러 고만고만한 경쟁자들은 합의로 [[게오르기 말렌코프]]가 이끄는 집단지도체제를 이끌었는데, 몰로토프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몰로토프는 [[니키타 흐루쇼프]] 짜고 서방에 매우 전향적인 유화정책을 제시한 [[라브렌티 베리야]]를 반역자로 몰아 숙청, 처형하는데 한 몫 했으나[* 나중에 몰로토프는 재밌는 회고를 하는데 베리야도 흐루쇼프가 자신을 회치려는 것을 눈치채고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에 몰로토프는 "내가 동지의 편이 되는게 아니라 동지가 '우리 편'이 되는 것이 나을 것이오."라고 대답했는데 베리야 평전의 저자 에이미 나이트는 이것이 대서방정책에 있어서 막가나는 유화정책을 더 펼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어쨌거나 베리야는 몰로토프를 회유하는데 실패했다.], 흐루쇼프의 반스탈린 정책이 시작되자 그와 불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1957년 6월, 흐루쇼프 제거 음모를 이끌어 정치국 투표에서 찬성 7표, 반대 4표로 그를 몰아내는데 성공한 듯했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국방장관 [[게오르기 주코프]]와 짜고 계략을 써서 이 결정이 효력화되는 것을 막고, 그 사이에 정치국에 밀려 상징적이던 기관인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소집하는 것으로 반격했다.[* 공산당에서 최고 지도기관은 당대회이고, 당대회와 당대회 사이를 당중앙위원회가,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와 전원회의 사이를 정치국이 주관하고, 레닌 말기, 스탈린 시절부터 정치국 내부의 최고 핵심들이 쑥덕거려 처리하는 체제가 완성되면서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정기적으로 소집은 되어도 의미 없는 상징적 의결기구로 전락한지 오래였다.] 흐루쇼프는 1957년 9월 중앙위원들이 전원 참석한 회의에서 중앙위원들을 동원하여 반격하였고 전원회의는 몰로토프, 흐루쇼프 및 모든 고참 공산당원들이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진흙탕 싸움이 되었으나 흐루쇼프는 스탈린 사후인 1954년부터 권력투쟁에 대비하여 당 곳곳에 자기사람을 계속 심고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전원회의 투표에서 머리수로 이겨버렸다. 그 결과 몰로토프는 정치국과 장관회의에서 쫓겨나서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몰로토프는 외교일선의 한직으로 복귀하여 [[몽골 인민공화국|몽골]] 대사(1957~1960년), [[국제원자력기구]] (IAEA) 상임대표(1960~1961년)를 역임한 후 1962년 은퇴했다. 빈에 있던 시절 1962년에 흐루쇼프가 축출되었다는 잘못된 소식을 접하고 아내 폴리나와 함께 관저에서 춤을 춘 일화가 남아있다. 몰로토프는 은퇴 직후 크렘린 근교의 고급 간부 아파트에서 계속 거주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덕분에 몰로토프는 남은 시간 대부분을 레닌 도서관[* 오늘날 러시아 국가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면서 보냈다. 하지만 1963년 흐루쇼프의 평화 공존 정책을 비판하는 논문을 작성하였는데, 이 때문에 1964년 6월에 당중앙위원회 총회에서 해당 행위자로 찍혀 비판받아 소련 공산당에서 출당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